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9 12. 모색1. 새로운 조선이 꽃 핀 자리 (3) 서유구의 임원과 위대한 인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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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9
12. 모색1. 새로운 조선이 꽃 핀 자리
(3) 서유구의 임원과 위대한 인간의 일
▲ 시를 잘 쓰지 않았다는 서유구, 하지만 그의 임원생활은 장편서사시와 같았다.(서유구, 프랑시스 잠)
“지금 시대에 천하 사물 중에서 시공을 통틀어 하루라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을 찾는다면 무엇이 으뜸인가? 곡식이다! 지금 시대 천하의 일 중에서 시공을 통틀어 신분의 귀천과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하루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을 찾는다면 무엇이 으뜸인가? 농사다!(서유구. 「행포지서」 임원경제연구소)”
우주 고금의 단 하나, 하루도 몰라서는 안 될 것이 곡식이고 농사란다. 농사에 대한 최상의 예찬이다. 풍석 서유구. 이렇게 선언한 그는 말이 아니라 실제 밭에 파묻혀 손에 못이 박히도록 농사일을 챙겼다.
“내가 늘 괴이하게 여기는 일이 있다. 요즘 벼슬아치들은 서울 밖 십 리 떨어진 지역을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황량하고 비루한 시골인 양 여긴다. 그리하여 아무리 벼슬이 끊어진 뒤라도 서울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려 들지 않는다.”(서유구. 「시태손」 서유구산문연구)
그는 경서를 읽고 고담준론을 하면서도 오곡은 이름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이쯤 되면 서유구가 변방의 초라한 선비거나 신분차별에 얽매인 서얼이 아닐까 싶다. 웬 걸! 그는 경화사족, 즉 촌놈들과는 근본이 다른 번화한 서울 명문가 출신이다. 또한 일찌감치 실력을 인정받아 조정의 요직을 맡아 일하던 고위관료였고, 경학에도 밝은 학자였다. 그런 그가 돌연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는다. 선비들의 흔한 귀향이나 은거가 아니었다. 그의 귀향은 우주의 근본인 ‘농’으로 한 귀의였다. 그는 임진강 건너 장단의 임원에서 농촌생활의 온갖 지식을 담은 ‘임원경제지’를 써 낸다. 삶에 필요한 전문분야를 16개로 정리한 유래 없는 거작이다. 113권 54책에 글자 수가 252만자, 인용문헌만 853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임원경제지. 풍석문화재단
세상을 구제하고 교화하려는 책은 차고 넘친다. 반면 시골에 살면서 뜻을 기르는 책은 변변한 것이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담준론의 경학이 아니라 농사다! 그는 농사가 세상을 구제하는 가장 실효적인 방법이라 믿었다. 그는 말만 높이는 지식사회를 겨냥한다. 곡식 이름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세상을 논하고 있다. “들에서 농사짓고 도를 즐기면 쟁기와 보습이 곧 경전”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한다. 그 30여년 농촌생활의 결실이 ‘임원경제지’였다. 그는 “농가에서 겪은 고생이 쌓이고 쌓여, 오래되니 책이 됐다”고 말했지만 그런 우연의 결과는 아니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대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원경제지’는 발간조차 되지 못했다. 당대에 외면당했으므로 서유구의 노력은 무용한 것일까? 그리고 어느덧 실효를 잃은 전근대의 기술지식이 된 것일까?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해법을 ‘오래된 미래’에서 찾는 노력은 필히 ‘임원경제지’와 만난다. 이것은 새로운 문명론이다. 저자는 오히려 미래에서 온 사람일지 모른다. 서유구는 시를 잘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 같은 삶을 살았다. ‘임원경제지’는 실용백과사전을 넘어 온몸으로 쓴 방대한 장편서사시다.
▲임원십육지. 풍석문화재단
“무릇 밭 갈고 베 짜고 작물을 재배하고 나무를 심는 기술과, 음식을 만들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하는 방법은, 시골에 사는 사람에게 필수다. 또 날씨의 변화를 예상하여 농사에 힘쓰고, 터를 살펴보아 살 만한 곳을 가려 집을 지으며, 기구를 구비하여 사용에 편리하도록 하는 일도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다. 선비가 어찌 먹는 일에만 신경 쓸 수 있겠는가. 화초 가꾸는 법을 익히고, 글과 그림을 바르게 공부하는 것에서, 보양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도 그만 둘 수 없는 일들이다.(서유구. 「임원경제지 서문」 중에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곽광수 옮김)”
백과사전의 서문과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한 시인의 시가 다르지 않다.
#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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